신용회복경험담
소박하지만 단단했던 일상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7.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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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소박하지만 단단했던 일상
저는 경북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50세 주부입니다. 자녀 둘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저희 부부는 늘 그렇듯 아침 일찍 밭에 나가고, 해 질 무렵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로 큰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 교육도 무사히 마치고, 남편과 둘이 오순도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땐 정말 지금의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2. 전개: ‘한번만 오르면 된다’는 착각
주식은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보내준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을 하다 보니, 주식 뉴스도 자연스레 접하게 됐고, 유튜브에선 ‘누구나 부자되는 법’이라는 영상들이 넘쳐났습니다.
처음엔 200만 원, 300만 원씩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금방 욕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신용 거래’와 ‘레버리지 투자’**라는 걸 접하고부터는 순식간에 9천만 원까지 빚이 불어났습니다.
문제는 주식이 급락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반등할 줄 알았지만,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증권사에서 반대매매가 발생해 계좌가 강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카드 대금과 저축은행 이자조차 감당이 안 됐습니다.
3. 위기: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던 날들
사실 남편에게는 꽤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벌여놓은 일이었고, 너무나 창피했거든요. 빚 독촉 전화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왔고, 밤마다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밤중에 혼자 울다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뒤, 남편에게 털어놓게 됐습니다.
남편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우리 같이 해결하자.” 그 말에 오열했습니다.
그 후 마을 지인에게 개인회생 제도에 대해 들었고, 진지하게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빚을 지고 1년 반쯤 되었을 때였어요.
4. 해결: 긴 터널을 지나며 찾은 숨 쉴 공간
상담을 받은 후, 서류를 준비하고 법원에 신청하기까지 약 한 달 반이 걸렸고, 인가까지는 총 4개월 정도 소요됐습니다.
저는 월 25만 원씩 36개월 변제하는 안으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나이는 많았지만, 소득이 꾸준한 농업 종사자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법원 출석 당시 판사님은 제 연령과 상황을 고려해주셨고, 성실하게 살아온 점도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남편과 둘이 막걸리 한잔하며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이후 독촉 전화는 사라지고, 정해진 금액만 성실히 내면 된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압박이 크게 줄었습니다.
5. 결말: 흙냄새 나는 삶, 다시 감사하게 되다
현재 저는 개인회생 2년 차, 남은 변제 기간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농사는 예전처럼 짓고 있고, 소비는 꼭 필요한 것만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남편과 더 단단해졌고, 자녀들에게는 제 실수를 고백하며 부채에 대한 교육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저처럼 ‘늦은 나이에 실수한 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개인회생은 기회를 다시 시작하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중요한 건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지금은, 그저 ‘조금 늦게 배운 인생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그 수업을 바탕으로, 더 단단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